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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 : '히말라얀 버킨백을 위하여'는 HERMES 또는 그 자회사나 계열사와의 공식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히말라얀 버킨백을 위하여] 컬렉션을 주제로 하는 전시입니다.
첫 번째 버튼을 눌러서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 버튼을 눌러서 '히말라얀 버킨백을 위하여' 게임을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 후 전시를 관람하시면 전시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경고 : 이 게임은 폭력, 도박 중독, 약물 오남용, 정신 질환 등의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정적인 소재 또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게임은 성산업, 인신매매, 살인 등의 범법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18세 미만 청소년의 플레이를 금지합니다.)

전시연계 퍼포먼스 | 2024.01.13. 14:00 | AM1257

AM1257은
라이브 퍼포먼스를 주축으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함께 동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작,연출 김상현
배우 이지영
음악 Mainspeaker

작가 '슈라이벤' 개인전 '히말라얀 버킨백을 위하여'에 맞춰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나' 와 '보이는 나'의 대화를 통해 과연 우리의 관계는 적절한지. 이 적절의 온도는 같은 체온인지. 오르고 있는 산 중턱에서 오늘도 나는 울부짖고 36.5도 보다 높은 38.5 도의 체온을 냅니다.

나를 감싼 털 보다 나를 감싼 나는.
살고 싶습니다.
살아야 합니다.
나는 나의 온도를 지켜야 합니다.

히말라얀 버킨백을 위하여


이 샤넬은 제 첫 명품입니다. 오픈런 알바를 좀 뛰었는데. 고객님이 사려던 가방이 제 취향이라서 그냥 사버렸어요. 요새 점심 밖에서 먹으려면 20불 정도 하죠? 카드 긁을 때마다 손이 벌벌 떨리던데. 이 가방 살 때는 망설이지 않았어요. 이 가방이 나를 바꿔줄 거라 믿었어요. 집에 더 많아요. 루이비통, 구찌, 티파니, 디올, 까르띠에, 에르메스. 가방, 셔츠, 코트, 구두, 시계. 다 있습니다. 멈추지 않아요. 짝퉁은 사지 않아요. 내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 눈에 잘 보이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이건 단지 제가 살아남는 방법일뿐입니다.

명품으로 온몸을 덮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맞아. 이게 나야.

비싼 돈 들여서 병원 다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효과적이에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요.

이게 제가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전시 평론


개인화된 감각으로 체득된 직설적이고 솔직한 동시대의 언어

- 미술감독 김종원 -


원고 청탁을 받고 며칠 글을 쓰다 출장이 겹쳐 일본 어느 여관방에서 글을 쓴다. 이곳은 내가 사는 그 어떤 곳과 다른 낯섦을 느낀다. 비슷하지만 낯선 도시의 모습 속에 읽히지 않는 문자와 서로 다른 언어 그리고 이국적인 풍경은 저마다 몽상 속에 완벽한 아름다운 도상으로 느껴진다. 그러다 여행이 익숙해지고 그들의 삶을 알아가기 시작하며 우리는 이내 이방인의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 만약 이곳이 며칠 머무는 여행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제2의 고향 이민자가 된다면 그 불안감과 고독감은 더욱 깊어 지고 여유의 동경보다 실존을 생각할 것이다.

슈라이밴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며 시대의 유사한 사유의 반복 그리고 언어의 차이를 몽상한다. 이는 필시 슈라이벤 작가뿐 아니라 요즘 20, 30대의 작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다. 본 필자는 슈라이벤 작가를 통해 특징들을 짚어본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 고독, 권태, 외로움의 굴레는 도시의 생성과 동시에 느끼는 인간의 특징이다. 다만 시대에 따른 언어적 온도에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슈라이벤 작가와 한참을 얘기하며 아주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한다, 그는 그가 느낀 낯섦에 대한 언어로 ‘이민자’, ‘강한 동물’, ‘명품’이라는 언어를 사유한다. 보통 필자의 사유에서는 ‘이방인’ ‘페르소나’라는 언어에 익숙한 터라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필자의 기준으로 70, 80년대 선배들은 진부한 모더니즘과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의 양립 속에 한국의 전통적 정체성을 계승하고자 하는 언어로 인간의 고독과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또한 본 필자가 해당하던 90, 2000년대에서는 1989년 독일 통일, 소련 해체 이후 세계화가 가속되며 세계인들의 이동과 PC통신, 인터넷 발달로 대중문화, 소비문화가 정착되면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경계가 희미해졌다. 자연스레 70, 80년대의 집단주의가 힘을 잃으며 개인의 가치, 개성이 중시되면서 작가들의 작품 간 공통점보다는 작품의 개념,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중시하는 개념 주의적 언어로 인간의 고독과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표상했다.

‘이방인’과 ‘이민자’의 언어는 유사하지만,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에서 이방인은 침범과 탈주에 놓인 모습으로 인간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한다. 슈라이벤의 이민자의 단어는 단절과 연속성에서 나오는 동시대의 모습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온도로 느끼는 대화보다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배젤을 통해 전달되는 무미건조한 언어는 감정이 배제된 전달 방식이다. 역시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한 동물이나 명품의 표상 또한 은유가 아닌 직설적인 동시대 페르소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슈라이벤의 표상에 나타나는 색에도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에서 표상되는 색상들은 기존 미술에서 볼 수 없는 특색이지만 요즘 동시대 작가들에겐 전혀 이질감 없는 익숙한 모습들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슈라이벤의 작품은 개인화된 감각으로 체득된 직설적이고 솔직한 동시대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슈라이벤 작가의 세계관에서 무너지는 디지털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맞물려 열풍을 불게 한 가상 세계의 바이블 영화 매트릭스(Andy Wachowski, Larry Wachowski, , Groucho Ⅱ, Silver, Village Roadshow, 1999, 136”) 가 상기된다. 하지만 슈라이벤 작가는 매트릭스의 영화를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세대이다. 하지만 그는 매트릭스와 유사한 세계관을 몽상했다. 역시 동시대가 만든 환경 속에 살아가며 철저히 개인화된 감각으로 체득된 실제이다.

이것이 동시대의 사유들이라고 동시대 작가들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만 위의 현상에서 표상은 이미 세련되고 완성된 작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작가의 정신 - 철학적 깊이는 얕은 아이러니한 허수(虛數)가 존재한다. 동시대의 이미지 정보의 바다와 기술은 동시대 작가들을 세련된 작가로 만들고 있다. 허수의 간극을 줄이는 것은 인터넷의 얄팍한 상식이 아닌 경험의 체득과 개인적 고찰이 겹겹이 쌓이는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앞으로 슈라이벤 작가의 표상과 사유는 또 어떻게 흘러갈지 또 어떤 언어를 들려줄지 묵묵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